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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 김승방 먹그림전

2007. 8. 24 - 8. 30 전북예술회관제3전시실(전주)

한국미술의 뿌리는 서예이고 서예가 중심이된 문인화가 한국미술의 희망이고 미래라고 확신하고 있는 양석 김승방의 먹그림전이 지난 8월24일부터 30일까지 전북예술회관 제3전시실에서 열렸다. 1994년 서울에서 가진 전시회에이어 13년만에 열리는 이번전시에는 남의 체본에 의존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고향집><고목><개구리><제비><묵란><묵죽>등이 선보이고 있다. - 편집부 -

 

틀 깨는 소리, 양석의 墨香 그리고 人跡 夢村

이우길 / 연극인


     내가 양석 김승방의 개인전 도록에 머리글을 싣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강호에 당신의 필명이 가득한데, 붓 한 번 들지 못한 문외한더러 도록의 첫 장을 내줄테니 자기를 논해보라 하니 필경 당구(堂狗)가 폐풍월(吠風月)하는 짝이 아닌가. 그러나 얼마나 신기한가! 그 엉뚱한 생각이 영판 양석 닮은 발상이고, 세상 살맛나는 설장고 같고 너무 상큼하다. 나에게는 일생의 영광 일터, 두고두고 자랑하게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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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이번 전시는 양석의 94년 서울 전 이후 13년 만이다. 긴 침묵을 깨고 나온 작품전의 도록을 동행도 아닌 소인(素人)이 잘못하여 양석의 書友 제현의 질책을 살까 걱정이다.     양석과 나는 밀양이 고향이고 중학 1학년 때 붙은 책상 짝지였다. 나는 학창시절 문학청년이었고 지금은 자칭 재야문도이다. 연극을 좋아해서 극단 하나를 후배들과 꾸려서 제작하고 후원하는 연극 주변인이다. 나는 서예는 문외한이다. 붓으로 글씨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모른 사이에 서예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많이 한다. 양석의 탓이다. 서예에 관한 나의 소양은 양석이라는 창을 통해서 바라보고 얻은 것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양석이 보내준 강암연묵회전, 진묵회전 도록을 통해서 서예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고나 할까!년 초에 보내주는 연하장도 내가 그의 서예를 이해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세월이 가면서 나는 대단한 착각 혹은 자기도취에 빠지게 된다.
    작품 한번 해보지 않고도 서예 평론가가 되어버린 환상을 갖게 된다. 1년에 몇 번이지만 양석을 보러 전주에 갈 때 마다 나의 서예공부는 일취월장(?)해서 어느 듯 일성을 토하기도 한다.
    양석이 나에게 실기 지도 한 번 한 적이 없지만 나는 그의 방을 몇 밤씩 뒹굴면서 그의 작품과 서책을 뒤지면서 냄새로 그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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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훔치는 즐거움에 빠졌었다.그는 언제나 지나가는 얘기로 서예를 말하고, 나도 흘리는 말로 작품을 강평한다.
    그는 세상 얘기 중에 서예를 끼워 넣고 몸으로 말한다. 중학시절 양석의 노트는 악필의 모범이었다. 천재를 숨기고 세상을 농락할 음모를 키웠음이야! 그때 나의 노트는 학교가 알아주는 달필의 법첩(?)이었는데, 그의 그 지독한 악필이 고졸한 명필로 진화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나는 그 현상을 희한한 기적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별일도 많지. 처음적 내가 보기로는 양석의 붓질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긋는 획 하나도 왜 그리 못 미덥던지 모른다. 첫 붓 박음도 아차 싶고 중간도 위험하고 끝 흘림이 그중 불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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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속으로 그랬다. 저렇게 미욱해도 괜찮은가. 기라성 같은 꾼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어쩌나! 나 혼자 안달이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흘러도 개선의 징조는 없어 보였다. 이 걱정을 거두게 되기는 한참 후이다. 그는 거북이 후손이다. 지금도 거북이처럼 진화하고 있지만, 그의 그 대단한 악필 캐릭터가 위대한 악필로 진화하는 탈바꿈이 치졸미의 완성으로 가는 몸짓인 줄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 몸짓이 틀 깸과 일탈의 준비인 줄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나는 양석이 서화라는 불사조의 등을 타고 미지의 곳으로 비상하고 있음을 본다. 그의 불사조는 틀 깸과 樸質의 두 날개로 난다. 날라서 해방의 땅 자유의 성으로 간다.
    그의 틀 깸은 탄생이며 창조였다. 樸質은 창조의 옷이다. 기존을 깨고 조야하고 생경한 옷으로 치장해서 보일 듯 말 듯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양석은 그렇게 행진했다. 악필의 내밀한 음모가 치졸미를 껴안고 그의 예술을 밀고 가는 것이다.
    양석이 한글에 경주하는 것이나 중국의 시문보다 우리 시를 편애하는 것도 틀 깸과 무관하지 않다. 서예의 뿌리가 중국에 있으나 그는 우리의 것으로 그만의 것으로 꽃피우겠다는 일념을 도도히 꿈꾼다. 자유를 추구하는 초서의 꿈을 한글에서 찾아 헤매는 결사를 본다.
    그가 그리는 난은 거실에서 곱게 자란 난이 아니라 시들고 비틀어진 잎이 있는 난이다. 여름철 한바탕 소나기를 맞고 마음대로 자란 농작물이고 들풀이다.
    근래 선보이는 초가집 개구리 고목 강아지는 그가 자란 농촌에서 일상 보았던 것 들이다. 그것을 양석의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년전 나의 중국 여행 중에 비림을 찾았을 때 많은 이들의 탁본작업을 보았다. 그 때 생각이 났다. 양석도 저렇게 탁본에 열중할까를 중국을 한 바퀴 황하와 장강 티벳으로 10여성을 돌면서 그들의 수많은 편액과 간판들을 보며 받은 느낌은 유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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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달필들이라니 가히 명필의 땅이었다. 그중에서도 늘 양석이 반추되었는데 그 구제할 수 없는 박질이라니. 유려함에 반역하는 그의 붓질은 중원을 향한 항전인가.
    書如其人 탁견이다. 모두의 끝은 사람이다. 예술이 아무리 한들 사람을 넘볼까. 아름다운 사람이 그리운 시대다. 멋진 사람이 그립다.
    양석은 멋이 없어서 멋진 사람이다. 서툼의 미학을 빌려서 반역의 붓질로 자기 인생을 그려간다.
    양석이 틀 깸을 도모하지만 질서를 배반한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무섭게 질서에 복무하던 그를 보았다. 30년 넘은 시절 그가 고향에 올 때 끼고 오던 초라한 가방에는 헌 신문지와 먹과 붓이 늘 들어있었는데 다니면서도 임서하고 연습하고 있었다. 신문지가 먹칠로 덧칠되어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밭에 글씨 했으리라. 그 때 도인 하나를 보았고 공부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다. 지금도 그는 그 질서의 수행을 멈추지 않으면서 그 것을 찬란하게 부수고 있다. 내가 양석에 傾倒하는 백미는 그의 생각이다. 붓이 아니다.
    교사는 백묵 쥐고 교단에 서야 한다며 한 눈 팔지 않고 멋있게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버릴 것과 얻을 것의 경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내가 양석을 만난 것은 축복이다.
    그는 내게 깊은 강물 닮은 우정을 주었고, 난향 짙은 묵향의 세계를 안내했다. 살면서 기쁠 때, 덧없이 허전할 때, 그를 떠올리면 편한 밤이 되게 했다. 스승 같은 애인 같은 벗을 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

2007년 7월 부산에서 -

양석 김승방의 인간과 예술을 말한다

- 송하경 성균관대 교수가 쓴 89년 부산전 머리글에서-

「書如其人」이란 아무에게나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이미 生命을 상실한 紙.筆.墨의 材料를 능히 生命化하여 文字的 造形을 主體的으로 人格化시킬 수 있는 작가에게만 통용된다. 百年의 세월 속에서도 古帖만을 임모(臨摹)하고 스승의 書風이나 방서(倣書)해 내는 사람에게는 무관한 말이다.
사람은 萬人萬面萬心이다.
個性과 理想을 매몰(埋沒)시키고 모사(模寫)와 倣書를 일삼지 않은 한, 모든 서예가의 작품은 各樣各色일 수 밖에 없다.
금번 우리는 양석의 개인전을 통해서 그의 개성과 모든 이미지를 금방 포착(捕捉)할 수 있다.
그가 쓰고 그린 한 문귀 한 글귀 혹은 새·난초의 그 어디에도 마음을 머물러 놓았거나 의식을 잔류시킨 곳이 없다. 단지 마음과 붓이 하나 되어 行筆의 완급(緩急)이 자연의 음악적 리듬을 타고 자유롭게 쓰여 졌을 뿐이다.
行間의 광협(廣狹)이나 字形의 大小나 書體의 유형에 아랑 곳 없다.
넓으면 넓은 대로 바람이 소통해서 좋고. 좁으면 좁은 대로 아늑해서 좋다.
크면 큰대로 여유 있어 좋고, 작으면 암팡져서 좋다.
비뚜러지면 비뚜러진대로 멋이 있어 좋고, 바르면 바른대로 정직해서 좋다.
篆法이든, 隸法이든, 楷法이든,草法이든 서로가 어우러지고 조화로워서 좋다. 그 무엇에도 매임 없이 붓이 가면 뜻이 따르고, 뜻이 가면 붓이 따른다.
양석의 서예는 해학(諧謔)스러워 좋다.
어린이가 쓰고 그렸는가 하면 대단히 매서운 知的 洞察力이 깃들어 있고, 어른이 쓰고 그렸는가 하면 너무도 꾸밈없는 치기(稚氣)가 서려 있다.
書風을 古法에서 찾고자 하니 너무나 現代的이요, 今法에서 찾고자 하니 지극히 고졸(古拙)하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원시와 문명이 혼

 

재(混在)하며, 人爲와 자연이 融合하고, 정감(情感)과 理智가 하나로 있다. 인생과 예술에 대한 고뇌(苦惱)가 깊숙이 숨겨진 채 항상 즐거운 낭만성(浪漫性)과 소박한 자연성과 不可思議한 유현성(幽玄性)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경향성은 모두 양석의 생래적인 樂天性, 素朴性. 眞實性 으로부터 비롯된다.
- 1989년 7월 -

어리석기가 어려운데

- 정충락 (서예평론가)가 94년 서화정보 4월호에 실린 전시평 “어리석기가 어려운데”에서 -

수년전 전주의 서예모임인 진묵회의 서울 나들이전에서 필자는 양석의 작품을 두고 치졸성에 있어서는 추사 이후 처음이라고 솔직한 표현을 한 바가 있었다.
양석을 알고 필자를 아는 몇몇이 수금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단체가 아닌 혼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鳳不群이라 했듯이 혼자 있는 그가 더욱 훌륭해 보인다.
특별하게 전시를 위한 제품이 아닌 그간에 틈틈이 익힌 것을 있는 그대로 꾸미거나 화장기 없이 들고 나온 그의 진솔한 선비적 자세가 왜 그렇게 높아 보이는 지 궁금하기만 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문인화, 그러나 그 어느 구석에서도 흠이 잡히지 않는 완벽한 몸가짐, 그러한 것이 바로 양석 김승방이 노리고 있는 서예적 표현방법 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교육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나가면서 예술의 접근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시도한 그의 학서 자세에서 그저 남의 체본에 의존하는 지금의 서단 풍토에는 큰 가르침으로 남을 것이다.
누가 누구 닮는다고 닮아지는게 아니다.
정말 陽石만이 할 수 있는 진솔한 자세의 노출에서 糊塗의 참뜻을 알게 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 1994년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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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약력
• 밀성고등학교 (61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66년) 졸업
• 전주성심여자중학교 재직 (1969년-2000년)
• 강암 송성용 선생 문하에 입문 (1968년)
• 한국서예협회 전북지부장 역임 (92-96)
• 전북서예대전 초대작가
•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 강암서예학술재단 이사
• 강암연묵회장
• 전주향교 일요학교 전통문화교실 서예강사
• 개인전 4회
• 강암연묵회, 진묵회, 전북문인화협회 회원
• 제1회 신춘휘호대전 심사위원 (93)
• 전북미술대전 서예부 심사위원장 (94)
• 전북서예대전 심사위원장 (97)
• 제7회 대구광역시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2000)
• 제14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 (2003)
• 제2회 대한민국 모약서예대전 심사위원     (2003)
• 제12회 경기도 서예대전 심사위원 (2003)
• 강암연묵회전 (70-현)
• 진묵회전 (80-현)
•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전
• 독일종이발명600주년 기념 초대전
   (90-베를린 국립박물관)
• 한국 현대서예 모색전 (91-마산송하갤럴리)
• 서울 국제현대서예전 (92-예술의 전당)
• 전북도제 100주년 기념전 (96-강암서예관)
• 역사의 정신 역사의 인물전
   (97-전주 삼성문화회관)
•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주최 21세기
   한국서예문인화 초대전 (2001년)
•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특별전
   (97. 99. 01. 03. 05.)